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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연재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칼럼은 모아 놓으면 경제 현황과 미래 전망에 대한 하나의 긴 논쟁이 된다. 이들의 칼럼은 대중이 경제를 이해하는 방식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이 서로에게 너그럽고 예의 바르지 않았다면 논쟁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둘은 사상적으로는 적이었지만, 사적으로는 친구였다. 다만 사상의 차이를 반영하듯 사고방식이나 글 쓰는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새뮤얼슨의 글은 그의 평소 성격과는 차이가 있었다. 글에서 그는 이미 명망이 높고 성공한 학자답게 때로는 상대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여유 있게 도전을 받아넘겼다. 반대로 프리드먼은 끄떡없는 상대방에 맞서 점수를 내기 위해 길거리 싸움꾼처럼 주먹을 날려댔다. 또, 프리드먼은 옹호나 비평을 통해 당대에 벌어진 사건에 개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정치적 글을 쓴 반면, 새뮤얼슨은 한때의 논쟁에 일일이 개입하기보다는 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글을 썼다.
프리드먼은 《뉴스위크》 칼럼이 성공한 원인으로 두 사람 사이의 애정과 존경심을 꼽았다. “정책에 대한 의견은 완전히 다를 때가 많지만, 폴과 나는 좋은 친구다. 우리는 서로의 능력과 경제학에 한 기여를 존경한다.”39 새뮤얼슨 또한 프리드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은 취지로 말했다. “우리가 의견이 갈리는 때가 많기는 하지만, 논리적·실증적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근본적인 지점에서는 서로를 이해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사람들이 알게 됐으면 좋겠어. 그동안 서로를 향한 애정과 우정, 존경심을 꽤 잘 감춰 왔다는 걸 말이야.”
—「1. 18년 논쟁의 시작」중에서

시카고학파 경제학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새뮤얼슨에게 시카고대학교를 떠난 것은 좋은 결정이었다. 시카고대학교 교수들은 실업자가 수백만 명에 달하던 1930년대 대공황 상황에서조차 정부가 사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새뮤얼슨은 대공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살아남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고민거리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주변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어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배가 고파요. 감자 하나만 주시겠어요?’라고 묻는 어린아이와 어른을 시카고의 중산층 거주 지역에서 매일 볼 수 있었습니다. 가슴 아픈 기억이지요.” 그는 자신이 배운 이론으로 주변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고 느꼈다. “제가 교실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북부 인디애나주와 일리노이주의 은행이 거의 다 파산하고 형이 대학에 가려고 모은 돈이 사라져 버린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제 가족은 윤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을 했다면 집에 돈을 더 벌어다 줄 수 있었을 테지만 일자리를 찾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습니다.” 새뮤얼슨은 1919~1921년 불경기에 노동자가 파업하자 고용주들이 멕시코 노동자를 들여왔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에 케인스가 그랬듯 새뮤얼슨도 눈앞에서 벌어진 대량 실업 상황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하는 시카고학파는 그가 보기에 악어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2. 다시 태어난 새뮤얼슨」중에서

비슷한 시기 프리드먼은 중요한 인물을 또 한 명 만났다. 1932년 가을, 막 완성된 시카고대학교의 사회 과학 연구소 건물에서 자신보다 세 살 어리지만 조숙한 학부 2학년생 폴 새뮤얼슨을 만난 것이다. 새뮤얼슨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이미 디렉터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그였다. 둘은 처음부터 강한 라이벌 의식을 느꼈고, 이는 지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로즈 프리드먼은 새뮤얼슨이 프리드먼보다 더 많은 기회를 누렸다며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심지어 아흔이 넘어서까지 새뮤얼슨이 누린 ‘특권’에 대해 투덜거렸을 정도였다.
새뮤얼슨이 전액 장학생으로 시카고대학교를 다닐 때, 프리드먼은 조교 일을 해서 겨우 학비를 마련했고 누나로부터 300달러를 빌려 집세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할 필요가 없었던 새뮤얼슨이 미시건호의 모래사장에서 매년 여름을 즐기는 동안, 프리드먼은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뛰었다. 그는 학교 식당에서 점심시간에 웨이터로 일했고 토요일에는 온종일 신발 가게에서 일했다.
프리드먼의 불평에 발끈한 새뮤얼슨은 자신도 일하고 싶었지만, 장학금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데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는 것이 옳지 않게 느껴졌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나중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저도 여름에 일해서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맥이 없으면 이력서를 800장 돌려 봤자 한 군데에서도 연락이 안 오는 시절이었어요.”
—「3. 프리드먼의 고군분투」중에서

이렇게 프리드먼이 링에 오르면서 1931년 영국에서 케인스와 하이에크가 시작한 지적 다툼은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논쟁은 겨우 넉 달 만에 막을 내렸지만, 1965년 《뉴스위크》 지면에서 시작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싸움은 거의 50년이나 계속되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대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싸움에서도 결정적 한 방은 나오지 않았으며, 아무도 링 위에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의 논쟁에서처럼 이번에도 논쟁의 강도와 열정은 치열했다. 향후 50년 동안 경제 이론이 나아갈 방향과 미국 경제의 관리자로서 연방 정부의 역할이 이들의 싸움에 걸려 있었다.
—「4. 케인스에게 맞서다」중에서

주제가 무엇이든 프리드먼과 새뮤얼슨의 의견 차이가 비롯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30년 전 케인스와 하이에크 사이를 가르고 있던 분열을 만나게 된다. 당시 두 사람, 그리고 경제적 좌파와 우파를 가르던 의견 차이의 핵심에는 다음 질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하는가? 정부 개입은 의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가?
—「5. 칼럼 경쟁」중에서

시장의 능력에 대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시각 차이는 근본적인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무리 오래 논쟁해도 이 차이를 좁히기는 힘들었다. 60년대 말,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세계를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둘의 차이는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서구 세계의 물가가 빠르게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2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물가 상승률이 치솟으면서 미국은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빠졌다. 하이에크로 하여금 케인스주의가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했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었다.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정치인들은 경제학자들에게 인플레이션을 멈출 방안을 묻기 시작했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이 칼럼을 통해 제시하는 해법은 서로 정반대일 수밖에 없었다. 인플레이션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논쟁은 경제 사상을 둘러싼 이들의 기나긴 논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6. 개입과 비개입」중에서

이제 통화주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프리드먼이 해야 할 일은 정부(미국 정부가 목표였지만, 사실 어떤 정부든 상관없었다)를 설득해 케인스주의를 버리고 통화주의를 채택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에게는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고 자신의 사상을 그 자리에 앉히겠다는 혁명적 야심이 있었다. 전미경제학회 연설로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프리드먼은 아직 사상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통화주의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위험한 실험에 시민을 동참시키려 하는 정치 지도자를 찾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사상을 검증할 기회를 얻어 워싱턴 D.C.에 입성하게 되었다.
—「7. 승승장구하는 통화주의자」중에서

새뮤얼슨은 통화량 변화율이 물가 상승률에 영향을 주는 유일한 요인이라는 프리드먼의 주장에 맞지 않는 사례에 초점을 맞췄다. 첫째, 사람들의 저축 또는 소비 성향이 변하면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량이 변하고 그에 따라 물가가 변한다. 마찬가지로 케인스가 ‘야성적 충동’이라고 부른 기업가 정신이 커지거나 새로운 투자 기회가 급격히 증가하는 경우에도 국민 총생산이 달라지면서 물가가 변할 것이다. 또, 공공 지출이 늘거나 세금이 줄면 생산량에 영향을 미쳐 물가가 달라질 것이고 심지어는 세금을 늘리고 그만큼 공공 지출을 늘리더라도 생산량이 변하면서 물가가 움직일 것이었다.
프리드먼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통화량을 늘리면 시차를 두고 물가가 오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새뮤얼슨은 프리드먼이 1958년 논문에서 말한 것과 달리, 통화량의 변화가 나타나는 시점이 경기가 하락하는 시점보다 빠르지 않고 오히려 느리다고 주장했다. 그는 데이터에 따르면 통화량 변화가 경기 침체의 시작을 알리는 지표가 된 것은 최근 몇 년의 일이라면서, 이는 “연준이 통화주의자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극심한 침체가 닥치기 전에 미래 경기를 예상해 미리 손을 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8.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중에서

청문회 막바지에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은 거의 일대일로 말을 주고받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프리드먼이 민간 기업에 세금을 얼마나 부과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와중에 새뮤얼슨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어 화를 낸 것이다. 새뮤얼슨은 이윤은 노동조합이 임금을 낮추는 데 합의해서 기업이 얻은 몫이므로 “그 합의의 대가로서” 법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법으로 이윤을 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고 거의 불가능하므로 대신 법인세를 대폭 인상해서 이윤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은 이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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