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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공기는 차가웠고 사방은 온통 캄캄하여 두려운 생각도 들었지만 이 이상 소음에 시달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공포심마저 마비시켰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우리 집 바로 윗집의 차례가 된 순간, 현관문을 통해 미세한 진동과 함께 희미한 악기 연주 소리가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내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오르면서 묘한 흥분과 희열이 몰려왔다. 잡았다, 요놈!

그때였다. 문득 귀에 맞닿은 금속 재질의 현관문이 놀랍도록 차갑게 느껴지며 그러고 있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중략)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뒤 두려움을 다독이며 애써 잠을 청했다. 소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소음 때문에 이상하게 변할지도 모르는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 p.25~26

그때 느꼈다. 이들은 모르는구나.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정말이지 모르고 있구나.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구나. (중략) 그때는 나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내가 쓴 글을 매도하는 그들에게 분노를 느끼기에 앞서 질투가 났다. 평생토록 저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저들은 모르고 있구나. 밤거리를 걷다가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지거나, 선팅이 진하게 된 택시를 타면 왠지 겁이 나서 내릴 때까지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거나, 모르는 남성이 말을 걸면 의심부터 하고 본다거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낯선 이가 나를 더듬을 때의 솜털이 곤두서는 그 감각을 절대 알 수도 없고 알려고 들지도 않겠구나, 하는 생각에 질투가 났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시기심이 들었다.
— p.32~33

마스크를 항시 착용하는 것, 개인위생에 신경 쓰는 것, 사람이 붐비는 장소는 되도록 피하는 것, 가능한 한 집에 머무는 것,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 늘 불안에 떨며 지내는 것, 팬데믹 와중에 스러지는 사회 곳곳의 연약한 이들을 보며 매번 절망하는 것, 이런 것들에 익숙해지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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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야 자주 씻으면 좋은 일이고, 마스크도 이젠 거의 의복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사람을 피해야만 하는 생활’ 역시 지금은 힘들어도 어떻게든 적응할 날이 올는지 모른다. 그러나 뒤의 두 가지는 도저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절망과 불안에 익숙해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으며 로스토프 백작에게 배운 바 있으니, 우선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 p.64~65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지점 때문에 나는 이성애 문제, 남성과의 감정적 교류로 힘들어하는 여성이 있다면, 어설픈 연애 지침서나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알려준다는 ‘비법서’ 대신 이 소설이야말로 유용한 조언서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기보다는 타인에게서 인정 욕구를 채우려 들고, 그러다 망가지고, 내팽개쳐지고,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어주는 소설이랄까.
— p.106

집으로 돌아가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니까. 돈을 벌 수도 없고, 아무도 인정해주지도 않으며 하다못해 자신이 무언가 쓸모 있다는 ‘효용감’조차 얻지 못하니까. 그러고 보면 영화 〈박화영〉의 주인공 ‘박화영’ 역시 주변인들에게 끊임없이 착취를 당하면서도 주문을 외듯 반복해서 말하곤 했다. “니들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면서. 이용당하는 줄 알아도 쓸모 있고 싶었던 것이다.

이처럼 다시 펼친 《연인》은 내게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소녀의 섹슈얼리티가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소녀가 자신의 효용감을 찾을 방편은 너무나 드물고,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효용감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 p.124~125

그럼에도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각각 초등학교 저학년과 미취학 아동인 아이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폭력의 세계에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조금 더 크면 필연적으로 그러한 세계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미 겪어보아서 너무도 잘 아는 세계. 그러면서 나는 상상해보곤 한다. 혹 나의 아이들이 그러한 폭력의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된다면 나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섬뜩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만약 그런 때가 정말로 온다면 내가 과연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나 있을까?
— p.138

그럼에도 불구하고 J와 함께했던 경험이 나를 아주 조금은 바꾸어놓은 것 같다. 한 번이라도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한다. 결과적으로 이후에도 J에게 받았던 것과 같은 전폭적인 사랑을 드물지만 몇 번인가 받아보았다. 그런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살면서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좇아 움직이고,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마음속으로는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그러한 단 한 명의 존재를 만나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단 한 명.
— p.177~178

소설 속에서 어른이 된 태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하지만 아마 멀지 않은 시기에 미래의 나는 다시 한번 울 것이고, 소설 속 태희의 결심과는 다르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이유로 울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의 나는, 훗날 이 사실을 잊게 되더라도 잠시 잠깐이나마 그 사실을 후회하거나 과거의 나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해본다.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와 다른 사람이되 같은 사람, 그리고 여전히 내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일 것이기에. 어쨌든 나는 어떻게 해도 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의 나는 내일도 나로 살기 위해 용기를 낼 것이다.
— p.187

이런 지점에서 소설을 읽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기도 하다. 현실은 언제나 소설을 뛰어넘는다. 소설을 읽다 보면 현실과 맞닿아 있는 많은 접점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현실을 이해하게 되고, 많은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체험도 하지만, 여전히 뛰어넘을 수 없는 단단한 벽을 느끼고,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뼈저리게 실감하는 경험 역시 하게 된다. 《아일린》을 읽고 난 지금처럼. 물론 이 역시 나 자신의 위선과 본심을 직시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 p.207

아직 많은 세월을 살아본 것은 아니며, 어쩌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를 의심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마지막 ‘인간성’이 존재한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환멸과 혐오가 밀려올 때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고자 애쓴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순진하다 여길 것이고, 어리석다고 느낄 테다. 하지만 잘못 교육받은 개를 다시금 훈련시키는 작업이 설령 헛된 시간 낭비일 뿐이더라도,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배신당하며 고통을 겪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적어도 우리 모두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오직, 우리가 ‘더 나빠지지는 않는’ 길이라 믿는다.
— p.217

그런 면에서 인간이 지닌 인간성이란 마치 물과 같은 것이다. 어느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고, 오염되기는 쉽지만 정화되기는 어렵다. 물론 어렵고 힘겨운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숭고한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또한 나는 악이 무너뜨릴 수 없는 인간만의 마지막 보루 또한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만 인간의 선량함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소설을, 이야기를 읽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 같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래서 악해지지 않기 위해서.
— p.226

하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사랑 앞에 모든 것을 감수하고자 하는 마음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세상에는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두 명의 아이를 낳고 기른 내가 더 이상 아이를 낳고 기르기 전의 나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혹은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채로는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에는 간혹 그런 경우도 있는 것이다.
— p.254

우리는 무언가를 다른 것의 ‘대체제’로서 사랑할 수 있는가?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언제나 또 다른 무언가를 새롭게 사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무엇도 다른 무엇을 ‘대체’할 수는 없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면 사랑을 중심으로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바로 그 마음이 대상을 고유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하물며 기계조차도 다른 기계를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 p.274

어쩌면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 사실 잘 모를 때는 사랑하기 쉽다. 좋은 것만 보이니까. (중략) 겉으로 드러난 좋은 것만 바라보며, 허물은 외면한 채로 좋은 감정을 품는 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을 바라보는 신의 마음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