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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의회는 왕위계승법(Act of Settlement, 1701)에 따라 스튜어트가의 먼 혈연인 독일의 하노버(Hanover) 선제후를 국왕 조지 1세(George I, 1714~1727)로 맞이했다. 조지 1세는 독일 제후로서 영어를 말할 줄 몰랐으며, 아들 조지 2세(1727~1760) 역시 마찬가지였다. 윌리엄 3세가 그랬듯이, 그들의 주된 관심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대륙의 영토에 있었다. 그들은 기꺼이 영국의 행정을 의회에 맡겼다. 조지 1세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기에 각료회의에 잘 참석하지 않았다. 따라서 각료들은 스스로 회합하고 정책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집합적으로 내각이라고 불렸다. 국왕은 내각이 결정한 사안을 승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선례는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고, 영국의 왕은 결국 명목상의 국가 원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전통이 형성되었다.
—「제10장 계몽사상과 절대왕정의 변화」중에서

내정 분야에서 나폴레옹이 이룬 최고의 치적은 법령의 체계적 법전화였다. 혁명 이전에 프랑스는 수백 개의 독자적인 지방 법체계가 있었는데, 국민공회가 이를 개혁하여 전국적으로 통일된 법체계를 수립하려고 시도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했다. 게다가 혁명으로 엄청난 양의 새 법령이 도입된 터라, 법전을 집대성할 필요성이 시급해졌다. 이에 나폴레옹은 유능한 법률가들을 동원하여 5대 법전으로 그 과업을 완성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804년에 편찬한 포괄적인 『민법전(Code civil des Franc?ais)』이었다. 1807년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eon)』으로 개칭된 이 법전은 모든 시민의 법 앞의 평등, 종교적 관용, 농노제와 봉건제도의 폐지, 재산권의 보호 등 혁명이 이룩한 중요한 성과들을 세세하게 명문화했다.
—「제11장 정치 혁명과 경제 혁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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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면화 재배 중심의 경제와 사회구조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었다. 남부 경제에서 면화 재배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 생산량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상당 부분이 영국 산업혁명의 영향이었다. 1810년에 남부는 면화 17만 8000꾸러미에 1000만 달러어치의 면을 생산했는데, 1860년에는 450만 꾸러미에 2억 4900만 달러어치를 생산했다. 1850년에 남부의 면 93%를 노예가 생산했다. 1808년 신규 노예 수입이 금지되었으나, 노예 인구는 극적으로 늘어나 1860년에 남부에는 흑인 노예가 400만 명이 넘었는데, 이는 1800년의 네 배였다. 면 재배의 농업 경제와 대농장에 기반을 둔 노예제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었고, 19세기 전반기에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시도로 인해 남부는 점점 더 방어적으로 되면서 고립되었다. 그와 동시에 북부의 노예제 폐지 운동의 성장은 남부 체제에의 도전이 되었으며, 이는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는 ‘정서적 연쇄반응’을 낳았다.
—「제12장 이데올로기의 시대」중에서

캐나다는 영국과 프랑스의 격렬한 식민지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의 어선이 뉴펀들랜드에 자주 드나들었으며,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s Bay Company)가 특허를 얻어 원주민과 모피 무역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유럽에서 7년전쟁이 터졌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에서 전쟁을 벌였으며, 1763년 파리 조약으로 캐나다가 몽땅 전승국 영국으로 넘어갔다. 영국 정부는 1774년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대헌장’이라 불린 퀘벡법을 제정하여, 가톨릭교를 믿을 자유를 보장하고 프랑스의 법과 관습을 보전했다. 그렇지만 영국 식민지에서와 같은 대의제 의회에 관한 규정은 전혀 없었는데, 당시에 캐나다의 프랑스인은 자치에의 관심도 그런 경험도 없었다.
—「제13장 제국주의의 전개」중에서

자연 재앙이 인류가 저지른 참혹한 대재앙을 훨씬 능가함을 보여주는 사태가 발생했다. 역사상 최악의 독감이 1918년 여름 처음 나타나 2년 동안 지구를 휩쓴 것이다. …… 그 전염병은 흔히 스페인 독감으로 불렸는데, 왜냐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전시 언론 통제로 병의 심각한 실상에 관한 보도가 금지되었고, 사람들은 오직 중립국 스페인 언론을 통해서만 그 질병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는 이를 미국 독감 혹은 시카고 독감이라고 불렀다. 당시 세계 인구 약 17억 명 중 5억 명쯤이 감염되었다. 사망자는 전 세계를 합쳐 2500~50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유럽만으로도 250만 명 이상을 헤아렸다. 14세기 중엽 유럽에 페스트가 대유행했을 때보다 절대 숫자만으로는 훨씬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여, 그야말로 인류 최대의 재앙이 되었다. 한반도에서도 인구의 절반 가까운 740만 명이 ‘무오년 독감’에 감염되고, 14만여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의 로이드 조지(Lloyd George)도, 미국의 우드로 윌슨도, 독일의 빌헬름 2세도 감염되었다.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와 에곤 실레(Egon Schiele),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스페인 독감으로 목숨을 잃었다. 어떤 연구자는 스페인 독감의 창궐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앞당겼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제14장 두 차례의 세계대전」중에서

피그스만 사건 이듬해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미사일은 미국으로서는 목에 들이댄 칼처럼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은 이미 이탈리아와 서독뿐 아니라 소련과 가까운 터키에 핵무기를 설치해 놓고 있었지만,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미국 핵무기가 소련 국경 근처 터키에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존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은 쿠바를 해상 봉쇄하고 미사일을 실은 소련 함대를 막았다. 1962년 10월 마침내 세계는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자칫하면 군사행동을 촉발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 며칠 이어진 끝에, 흐루쇼프는 미국이 쿠바 영토를 존중한다는 보증과 터키에서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양보를 얻어낸 뒤 미사일을 철수했다. 소련은 쿠바의 공산 체제를 지켰고, 미국은 코앞의 핵 위협을 제거했다. 위기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제15장 냉전 체제와 제국주의의 청산」중에서

1999년 12월 31일 옐친은 갑자기 사임했고, 그가 8월에 수상에 임명하면서 후계자로 지목한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이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었다. 푸틴은 비밀경찰로 악명을 떨친 국가보안위원회 요원 출신이었는데, 옐친의 신임을 발판으로 벼락출세한 인물이었다. 2000년 3월 대통령에 선출된 그는 전해부터 재발한 제2차 체첸 전쟁을 조속히 끝내고 체첸을 다시 러시아 지배 아래로 되돌려놓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2000년 내내 체첸에서 전투가 계속되고, 수도 그로즈니(Grozny)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푸틴은 결국 체첸 독립운동의 싹을 거의 잘라냈다. 국제적 비난이 쏟아졌지만, 국가 위상의 추락으로 상실감에 젖어 있던 러시아 국민은 푸틴에 열광했다. 제2차 체첸 전쟁은 2009년 러시아 정부가 체첸의 ‘반테러 작전’을 종결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끝났다. —「제16장 냉전 종식과 그 이후의 세계」중에서